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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기 안 치우는 자연사박물관의 황당한 해명

뉴욕자연사박물관이 '욱일기'(일본 전범기)와 일본해 표기 관련 "당시 상황을 드러내며 표준을 따른 것"이라며 시정 요구를 사실상 거절했다. 2022년 흑인 인권 운동의 여파로 루스벨트 대통령, 인디언, 흑인의 대형 기마상을 철거하는 등 변화하는 시류에 맞추겠다고 밝힌 입장과 사뭇 다른 태도다. 〈본지 4월 24일자 A-1면〉   관련기사 이번엔 일본해…자연사박물관, 욱일기 이어 ‘또’ 켄드라 스나이더 박물관 커뮤니케이션팀 관계자는 지난달 본지에 "회신이 너무 늦어 미안하다. 박물관 측의 공식 답변을 전한다"며 연락을 취해왔다. 지난 4월 본지가 제기한 문제의 장소는 ▶2층 메인 로비 티켓부스 왼쪽 벽화의 욱일기·일본해 표기 ▶'Asian People' 역사관 안내판의 일본해 표기 등 세 곳이다.   먼저 벽화에 대해 박물관은 뉴욕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기념하며 그린 기념물이며 뉴욕시 랜드마크라는 논리를 폈다. 그러면서 벽화를 그린 시기는 1935년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지난 2012년 보수 작업 당시에도 이를 그대로 재현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당초 한인사회에선 보수 작업을 하면서도 욱일기를 다시 그렸는지에 대한 질의가 이어졌지만, 박물관은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박물관은 본지에 "랜드마크로 지정됐다는 건 건축·역사문화적으로 보존해야 할 중요성이 크다는 뜻"이라며 "어떠한 현대적 고려도 없이, 루스벨트 대통령이 1905년 일본과 조약을 맺는 걸 그린 것으로, 그의 공적 삶에서 중요한 장면을 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일본해 표기에는 "알려줘서 고맙다"면서도 "이 표기를 쓸 때 우리는 미디어와 국제 조직에서 널리 쓰이는 표준을 따랐다"고 덧붙였다.   그들이 주장한 표준 관련한 추가 질의에는 3일 현재까지 답하지 않고 있다.   박물관은 강령을 통해 "다양성·평등성·포용성을 강조한다"며 "서구적 시각에서 표현한 박물관의 전시 방식에 대해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 전세계 박물관의 문화적 맥락에 반하는 것, 인종차별 및 민족중심적 관행에 대한 비판 등도 검토하며, 식민지주의와 제국주의 관점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 같은 가치들은 더 이상 오늘날의 것이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커뮤니티와 이를 위해 협력하고 있다"며 "그 예시로 루스벨트 대통령 동상에 대한 여러 관점을 담은 기획물을 개발하는 것 등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다양성을 갖는 도시에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강령은 지난 2019년 6월 이사회에서 채택됐다.   최윤희 한인학부모협회 회장은 "저들이 주장하는 논리와 그들의 대응이 맞지 않는다"며 "본인들이 그렇게 밝힌 가치가 있으면 반드시 이를 따라야 한다"고 비판했다. 강민혜 기자 kang.minhye@koreadailyny.com일본 자연사박물관 루스벨트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제국주의 관점

2024-10-03

무명의 독립운동가들…그 흔적을 찾아서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아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이곳 미국 땅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숨은 영웅들이 있었다. 무명의 독립운동가,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루스벨트대통령의 뉴욕 롱아일랜드 별장에서 생긴 일   1905년 8월 4일자 뉴욕타임스(NYT)는 이승만 박사의 루스벨트 대통령 방문기를 보도했다. 이때 이승만의 옆에는 숨은 독립 영웅, 윤병구 씨가 있었다.     1903년 하와이에 목사로 파견된 윤병구 씨는, 한인 대표로 1905년 7월 하와이에 잠시 들른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만나 루스벨트 대통령을 접견하기 위한 소개장을 받게 됐다. 이를 한국의 독립을 위한 중요한 계기라고 생각한 윤 씨는, 소개장을 받은 즉시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공부 중이었던 이승만을 찾아가 뉴욕 롱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 별장에 머물던 루스벨트 대통령 방문 계획을 상의했다.     당시 NYT 기사에 따르면, 윤 씨와 이승만은 루스벨트 대통령과 사전에 약속도 없이 오이스터베이에 도착해 인근 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이 호텔에 들어가 등록하는 데는 적지 않은 설명이 필요했다. 실랑이가 계속되자 기자들이 모여들었고, 윤 씨는 방문 목적을 미국 언론에 알릴 기회를 갖게 됐다.     그 결과 윤 씨는 호텔 대기실에서 장장 1시간에 걸쳐 한국의 어려운 실정을 설명하고, “나와 이승만은 자주독립을 갈구하는 모든 한인들을 대표해 루스벨트 대통령을 접견하러 왔다”고 전했다. 그는 외신 기자들에게 “한미간의 수호조약은 아직 유효하며, 따라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우리가 미국에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우리가 미국 대통령과 국민들에게 원하는 것은 한국문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NYT는 다음날인 8월 5일에도 〈대통령을 접견한 한인들(Koreans See the President)〉이라는 기사를 보도했는데, 이에 따르면 윤 씨와 이승만은 약 30분간 루스벨트를 접견하고 청원서를 제출했다.     윤 씨는 이후에도 ‘대한인국민회’의 지방외교원으로 임명돼 미국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한국의 상황을 언론에 소개했고,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자유대회에서 미국정부에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하는 청원서를 작성한 3인 중 1인이기도 했다. 그는 해방 직전인 1945년 4월 25일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평화회의에 이승만과 함께 한인대표로 참석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     ◆1936년 일본영사관 앞에는 그가 있었다   1936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순간이 탄생했다. 독일의 베를린올림픽에서 한국의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신기록을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한 것. 한국의 언론들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앞다퉈 보도했는데,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 부착된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신문에 게재했다. 이에 일본당국은 두 신문을 강제로 폐간시켰고, 이에 분노한 뉴욕의 한인들은 일본영사관 앞에 나가 열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때 시위를 주도한 인물이 숨겨진 독립 영웅, 임창영 씨다. 뉴욕한인교회의 4대 담임목사였던 임창영 씨는 신문 폐간 소식을 듣고 뉴욕의 한인들을 이끌고 5애비뉴에 위치한 일본영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했다. 이후 1937년 일본이 한국어 사용을 금지시키는 강경한 탄압정책을 쓰자, 또 한인들을 이끌고 일본영사관에 나가 “일본상품을 보이콧하자”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시위에는 5애비뉴의 교통을 1시간가량 차단시킬 정도로 많은 인원이 참가했고, 다수의 미국 시민들도 동화돼 함께 한국 독립을 위한 목소리를 냈다.     ◆대한민국의 확성기   1896년 워싱턴 한국공사관 직원으로 도미한 김헌식 씨는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뺏기자, 미국에 주저앉아 맹렬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0년 8월 26일 NYT는 그를 “105인 사건(1911년 일제가 항일세력에 대한 통제를 위해 데라우치총독 암살모의사건을 조작,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에 대해 항의하는 서한을 미국 언론에 보내거나, 미국 국무장관에게 진정서를 자주 보내는 뉴욕의 대표적인 한인 인사”라고 소개했다. 이후 김 씨는 1917년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국동맹회 집행위원회 임원으로 선출돼 “일본의 한국 합병은 위헌이고, 윌슨 대통령의 약소국자결권 부여선언은 지켜져야 한다”는 결의문을 미국 국무부에 제출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확성기 역할을 했다.   글·사진=윤지혜 기자일본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그들 루스벨트 대통령 한국 독립

2024-08-15

[워싱턴 읽기] 루스벨트를 알면 바이든 선거가 보인다

미국 역사상 대통령을 4번 지낸 유일한 인물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처음 대통령직에 도전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1932년 1월이다. 그는 뉴욕 주지사로 재임하면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대공황 시대를 맞아 주 차원의 구호 프로그램인 산업보험, 자연보호 관련 일자리 창출 등으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추진한 ‘뉴딜플랜’의 진원지는 그래서 뉴욕이다.     루스벨트는 뉴욕 주지사를 연임하며 최고의 주지사란 평가를 받았고 마침내 193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리고 당시 최악의 지지율로 허덕이던 허버트 후버를 압도적인 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대공황으로 고통받던 국민에게 국가주도로 이른바 ‘뉴딜정책’을 성공시킨다. 1935년 여름부터 경기가 회복세로 전환되는 덕분에 1936년 재선에 성공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전시 지도력(군수산업)을 발휘해서 1940년 3선 대통령이 되었다. 재선까지만이라는 조지 워싱턴의 전통을 깼다.       루스벨트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면서 1944년 4선 대통령에 도전했다. 전시에 인기가 있었고 심각한 반대 없었다. 루스벨트의 진보적인 사회.경제 정책에 회의적인 사람이 늘고 있었지만 루스벨트를 반대하는 계파는 없었다. 다만, 루스벨트의 건강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이 가장 심각한 일이었다. 측근들과 당 지도부는 루스벨트의 4선 도전 의지가 워낙 강해서 그의 승계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루스벨트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1년 이상 살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부통령인 헨리 월레스가 대통령직을 승계하기엔 그가 너무나 진보적이어서 매우 위험하다고 보았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그러한 우려 때문에 월레스에겐 알리지 않고 측근들에게 부통령 후보를 교체할 것을 내락했다.     측근들은 미주리주 출신의 재선 상원의원인 해리 투르먼을 후보로 내세웠다. 1944년 7월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는 루스벨트를 만장일치로 대통령 후보로 추대한 후 부통령 후보 선거에서 진통을 겪었다.  1차 투표에서 현직인 월레스가 429대 319표로 이겼지만 과반수를 채우지 못했다. 2차 투표에서는 트루먼이 1031대 319표로 이겨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민주당의 루스벨트 팀은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대승했다. 측근들의 예상대로 루스벨트는 취임 석 달 만에 급사하고 트루먼이 3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2024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은 경선이 없을 듯 보인다. 최근 바이든 대통령의 의회연설과 화려한 폴란드·우크라이나 방문은 분명히 재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 일이다. 이번 달 초 대통령의 주치의는 바이든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공화당은 바이든이 고령으로 스스로 몸 간수하기도 어려운 상태이고 정신적으로도 결함이 있다며 네거티브 캠페인을 할 태세다. 공화당의 이런 공격적인 네거티브 캠페인이 먹혀들 여지는 충분해 보인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당원들조차 바이든의 나이와 건강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음이 나타났다.     1942년생인 바이든은 취임 시점에서 이미 최고령 대통령이 되었고 첫 임기를 마치면 82세로 첫  80대 대통령이란 기록을 세우게 된다. 현직이 또 출마할 것을 결심하면 어떻게 할 방도는 없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가장 존경한다고 밝힌 바이든에겐 더욱 그렇다. 건강상 문제에도 불구 4선에 성공한 루스벨트는 그의 4번째 임기가 시작된 지 82일 만에  63세의 나이로 숨졌다.     루스벨트는 4선 도전 훨씬 전부터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침실에 틀어박혀 있어야만도 했다. 심부전을 치료하지 않으면 1년 이상 생존할 가능성이 작다는 진단에도 불구  그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당시 차기 부통령에게 국가를 이끌 좋은 기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고 그래서 민주당은 부통령 후보에 더 공을 들였다. 당시엔 부통령 후보도 대통령 후보와 마찬가지로 대의원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33대 해리 투르먼 대통령이 취임했다.      요즘 워싱턴의 정치 전문가들 입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탄생한 과정에 주목하라는 뜻이다. 민주당 지도부와 측근들은 오히려 승계 문제에 집중해서 부통령 후보를 더 신중하게 따져보는 일이 이 딜레마를 다루는 현명하고 설득력 있는 방법이 아닐까?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루스벨트 선거 루스벨트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선거

2023-03-08

[J네트워크] 연방수사국과 에드거 후버

미국에는 한국의 국가경찰과 같은 연방 경찰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미국 독립 직후인 1789년 의회가 법원조직법을 제정하며 연방 검사와 함께 창설한 연방보안관(US Marshal)이 최초의 연방 법 집행기관이다. 연방 법무부 장관(검찰총장) 소속이다. 주 임무도 연방 죄수를 호송하고 수배자를 체포하고 연방 증인을 보호하고 압류 자산을 관리하는 등 우리 검찰에 가깝다. 각 주가 모여 합중국을 구성한 미국엔 주와 시·카운티·타운마다 자치경찰이 있기 때문이다.   1908년 창설된 법무부 수사국이 모태인 연방수사국(FBI) 역시 경찰이 아니다. FBI 구성원은 특별 수사관이고, 별칭이 ‘지맨(Government man)’이다. 또는 연방정부 요원으로 부른다. 반독점법 위반, 금융·토지사기, 특허범죄 등 신종 연방 범죄와 무정부주의와 같은 국가안보 위협에 대응하는 연방 기구의 필요성에 탄생한 게 FBI였다.     그전까지 법무부는 자체수사 인력 없이 매번 재무부 산하 위폐 단속 조직인 비밀조사국(Secret Service·1865) 요원을 빌려 쓰다가 당시 의회가 제동을 걸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법무장관이 직접 요원을 채용해 상설 조직을 만들도록 했다. 이후 국세청(IRS)에서 금주법을 집행하는 밀주단속국을 법무부로 이관받아 흡수하면서 FBI는 점점 커졌다. 마피아의 대명사인 알 카포네와 전쟁을 벌인 그 조직이다.   하지만 FBI는 1924~1972년 무려 48년간 종신 수장을 지낸 에드거 후버 국장을 빼고 얘기할 수 없다. 그는 FBI를 세계 최고 수사기관이자 국내 정보 기구로 키웠지만 동시에 할리우드 배우부터 대통령까지 사찰한 권력남용의 대명사였다. 국가안보를 이유로 1930년대부터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보수집 허가를 받아 극우 및 공산주의자란 혐의를 두고 민간인에 대한 광범위한 도청과 사찰을 벌였다. 심지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여사를 시작으로 트루먼·아이젠하워·케네디·존슨·닉슨 등 후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의 사생활과 국정 전반을 도청하기도 했다. 트루먼과 케네디 등이 후버를 여러 번 해임하고 싶어했지만 그때마다 ‘후버 파일’의 위협에 뜻을 접어야 했다.   문재인 정부는 검찰권 비대화 때문에 70년 검찰 수사권을 완전히 폐지하는 대신 ‘한국형 FBI’를 만들겠다고 한다. 한국형 FBI 구상대로 제도를 수입하면 ‘후버’란 괴물도 따라올 경우 견제 장치는 어떻게 할 건가. 그보다 당장 2024년 국정원 안보수사권을 이관 받는 FBI 몇 배 규모의 치안·수사·정보기관이 탄생하는데 아무 대책이 없다.  정효식 / 한국 중앙일보 사회1팀 팀장J네트워크 연방수사국과 에드거 에드거 후버 루스벨트 대통령 후임 대통령

2022-05-01

[노트북을 열며] ‘한국형 FBI’가 낳은 ‘한국형 후버’

미국에는 한국의 13만 국가경찰과 같은 연방 경찰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미국 독립 직후인 1789년 의회가 법원조직법을 제정하며 연방 검사와 함께 창설한 연방보안관(US Marshal)이 최초의 연방 법집행기관이다. 연방 법무부 장관(검찰총장) 소속이다. 주 임무도 연방 죄수를 호송하고 수배자를 체포하고 연방 증인을 보호하고 압류 자산을 관리하는 등 우리 검찰에 가깝다. 각 주가 모여 합중국을 구성한 미국엔 주와 시·카운티·타운마다 자치경찰(또는 보안관)이 있기 때문이다.   1908년 창설된 법무부 수사국이 모태인 연방수사국(FBI) 역시 경찰이 아니다. FBI 구성원은 특별 수사관이고, 별칭이 ‘지맨(Government man)’이다. 연방정부 요원이란 뜻이다. 반독점법 위반, 금융·토지사기, 특허범죄 등 신종 연방 범죄와 무정부주의와 같은 국가안보 위협에 대응하는 연방 기구의 필요성에 탄생한게 FBI였다. 그전까지 법무부는 자체수사 인력 없이 매번 재무부 산하 위폐 단속 조직인 비밀조사국(Secret Service·1865) 요원을 빌려 쓰다가 당시 의회가 제동을 걸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법무장관이 직접 요원을 채용해 상설 조직을 만들도록 했다. 이후 국세청(IRS)에서 금주법을 집행하는 밀주단속국을 법무부로 이관받아 흡수하면서 FBI는 점점 커졌다. 마피아의 대명사인 알 카포네와 전쟁을 벌인 그 조직이다.   하지만 FBI는 1924~1972년 무려 48년간 종신 수장을 지낸 에드거 후버 국장을 빼고 얘기할 수 없다. 그는 FBI를 세계 최고 수사기관이자 국내 정보 기구로 키웠지만 동시에 할리우드 배우부터 대통령까지 사찰한 권력남용의 대명사였다. 국가안보를 이유로 1930년대부터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보수집 허가를 받아 극우 및 공산주의자란 혐의를 두고 민간인에 대한 광범위한 도청과 사찰을 벌였다. 심지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여사를 시작으로 트루먼·아이젠하워·케네디·존슨·닉슨 등 후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의 사생활과 국정 전반을 도청하기도 했다. 트루먼과 케네디 등이 후버를 여러 번 해임하고 싶어했지만 그때마다 ‘후버 파일’의 위협에 뜻을 접어야 했다.   문재인 정부는 검찰권 비대화 때문에 70년 검찰 수사권을 완전히 폐지하는 대신 ‘한국형 FBI’를 만들겠다고 한다. 한국형 FBI 구상대로 제도를 수입하면 ‘후버’란 괴물도 따라올 경우 견제 장치는 어떻게 할 건가. 그보다 당장 2024년 국정원 안보수사권을 이관받는 FBI 몇 배 규모의 치안·수사·정보기관이 탄생하는데 아무 대책이 없다. 정효식 / 한국 사회1팀 팀장노트북을 열며 한국형 후버 루스벨트 대통령 에드거 후버 후임 대통령

2022-04-27

[J네트워크] 동대청과 루스벨트룸

한쪽은 넓었고 한쪽은 좁았다. 지난 16일 미·중 정상 회담장은 달랐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베이징 인민대회당 1층 동대청(東大廳)에 앉았다. 2007, 2012, 2017년 중국공산당 상무위원에 선출돼 중·외신 기자를 처음 만났던 바로 그 방이다. 내년 가을에도 다시 들어설 방이다.   북대하(北戴河)부터 베이징 거용관(居庸關)의 가을 풍경을 담은 ‘유연금추도(幽燕金秋圖)’가 걸렸다. ‘쓸쓸한 가을바람은 다시 세상을 바꾼다’는 마오쩌둥의 시구를 적었다. 1994년 국경절 전야에 걸렸다. 폭 16m. 인민대회당에서 가장 큰 벽화다.   동대청은 단골 정상회담장이다. 대회당 북문으로 입장한 외국 정상은 입구에서 중국 국가주석의 영접을 받는다. 북대청에서 환영 의식인 삼군의장대 실내 사열을 받는다. 맞붙은 동대청으로 이동해 정상회담을 갖는다.     2017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그해 12월 문재인 대통령, 2018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모두 시 주석과 이 방에서 마주 앉았다.   같은 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백악관 루스벨트룸에 앉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 대통령의 집무실이었다. 193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대통령이 새로운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를 만들며 회의실로 바꿨다.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두 루스벨트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며 이름을 붙였다. 두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렸다.   루스벨트룸에서 바이든과 시진핑도 만났다. 2012년 2월 13일 바이든은 시진핑에게 여기서 문건을 건넸다. 왕리쥔 충칭 공안국장이 넘긴 보시라이·저우융캉의 쿠데타 계획이었다.   9년이 흘렀다. 주요 2개국(G2) 정상으로 둘은 다시 마주했다. 첫 회담장으로 켜켜이 역사가 쌓인 무대를 골랐다.     회담은 치열했다. 194분간의 회담을 끝내고 각자 발표문을 냈다. ‘하나의 회의 두 개의 성명’ 모델이다. 미·중 회담의 뉴노멀이다.   지난 3월 알래스카 2+2회담에서 시작됐다. 중국 당정 기관이 문 양쪽에 두 개의 문패를 거는 ‘하나의 기관 두 개의 문패’ 방식이다.   둘의 만남은 늦었다. 2013년 시 주석은 국가주석 취임 86일 만에 캘리포니아를 찾아 오바마를 만났다. 2017년 트럼프를 맞아, 취임 76일 만에 플로리다로 날아갔다. 2021년 바이든이 취임했다. 시 주석은 미국을 찾지 않았다. 바이든 취임 300일째 버추얼 회담을 가졌다.   오는 2025년 47대 미국 대통령은 중국 일인자와 언제 어디서 만날까. 대만은, 한반도는 어떤 모습일까. 신경진 /한국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J네트워크 루스벨트룸 루스벨트 대통령 국가주석 취임 정상 회담장

202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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